이준석이 소환한 세종대왕 세법, 17만 명에게 물었던 '공법 개혁'은 무엇일까

세종대왕 세법 개혁
세종대왕 공법 개혁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새로운 세법을 만들면서 무려 17만 명이 넘는 관료와 백성에게 찬반 의견을 물었다는 사실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2026년 8월 10일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이재명 정부의 ISA 개편안 재검토를 비판하면서 세종의 공법 개혁을 사례로 꺼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록을 확인해 보면 당시 공법에 찬성한 사람은 9만8657명, 반대한 사람은 7만4149명이었습니다. 찬성이 과반이었지만 세종은 처음 구상한 세법을 그대로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지역별 이해관계와 토지 생산력 차이를 다시 살폈고, 여러 차례 시험과 수정을 거쳐 1444년 전분6등법·연분9등법을 핵심으로 하는 공법을 확정했습니다.

핵심 요약
세종은 1430년 공법 도입을 놓고 관료와 백성 17만2806명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찬성은 9만8657명, 반대는 7만4149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역별 찬반 격차가 컸고 제도적 문제도 확인되면서 원안을 바로 전국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수정과 시험을 반복해 1444년 전분6등·연분9등 체계의 공법을 확정했습니다.

이준석이 세종의 세법을 꺼낸 이유

이준석 대표는 8월 10일 개혁신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최근 정부의 ISA 개편안 논란을 비판하면서 세종의 공법 개혁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했습니다. 

정부는 8월 3일 ISA 제도 개편 내용을 내놓았지만 투자자 반발이 이어졌고, 이재명 대통령은 8월 7일 참모들과의 상황점검회의에서 개편안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ISA 개편안에 대해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에 이 대표는 세종이 세법 하나를 마련하면서 장기간 의견을 듣고 수정했던 사례와 최근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을 대비시켰습니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구분이 필요합니다. 세종의 공법 제정 과정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를 현재 정부의 정책 결정과 비교해 평가하는 부분은 이준석 대표의 정치적 주장입니다. 

두 사안을 동일한 조건의 정책 사례처럼 단순 비교하기보다는 세종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따로 살펴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세종이 바꾸려 했던 기존 세법

세종이 개혁하려던 것은 토지에서 거두는 전세였습니다. 당시에는 관리가 직접 농경지를 찾아가 한 해 농사가 얼마나 잘됐는지를 살핀 뒤 세금을 정하는 답험손실법이 운용되고 있었습니다.

흉년에는 세금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관리가 작황을 직접 판단하다 보니 평가가 주관적일 수 있었고, 지방 관리의 농간으로 부유한 사람은 유리하고 가난한 농민은 불리해지는 폐단도 나타났습니다. 『세종실록』에도 세종이 이 문제를 직접 우려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7만2806명에게 찬반을 물었다

1430년 세종 12년, 호조는 새로운 공법에 따라 토지 1결당 곡식 10두를 정액으로 걷고 평안도와 함길도는 7두를 거두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세종은 이를 바로 시행하지 않고 중앙 관료와 지방 관리, 품관은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찬반을 묻게 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국에서 의견을 낸 사람은 총 17만2806명이었습니다.

구분 인원 비율
찬성 98,657명 약 57.1%
반대 74,149명 약 42.9%
합계 172,806명 100%

오늘날의 국민투표와 같은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인이 한 표씩 행사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왕조시대에 세법을 미리 알리고 전국의 관료와 백성에게 대규모로 의견을 물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정책 결정 과정입니다.

과반인데 왜 바로 시행하지 않았나

전국 합계만 보면 공법 찬성이 57%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지역별 결과를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지역 찬성 반대 특징
경상·전라 65,864명 664명 생산력이 높은 지역으로 찬성이 압도적
함길·평안 1,410명 35,912명 상대적으로 척박해 반대가 압도적

같은 면적에 동일한 세금을 부과하는 정액 방식은 생산성이 높은 남부 지역과 척박한 북부 지역에 전혀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경상도에서는 찬성 의견이 많았지만 함길·평안·황해·강원 등에서는 불가하다는 의견이 많았다는 보고가 나옵니다.

이때 세종은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자가 있기 때문에 세법 개혁 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세종은 기존 답험손실법의 폐단도 심각하다고 판단했고, 새로운 공법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14년에 걸쳐 세법을 다시 설계

이준석 대표가 말한 ‘14년’은 1430년 대규모 의견수렴에서 1444년 최종 공법 확정까지를 계산한 것입니다. 실제 공법에 대한 세종의 고민은 그보다 앞서 시작됐지만, 1430년의 대규모 조사 이후에도 제도가 한 번에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연도 공법 개혁 과정
1430년 전국 관료·백성에게 공법 찬반 의견 수렴
1436년 전제상정소를 설치해 공법을 집중 검토
1437년 상정공법 마련, 지방 반대가 커지자 전국 시행 중단
1438년 이후 경상·전라 등 일부 지역에서 시험 시행하며 수정
1444년 전분6등·연분9등을 핵심으로 최종 공법 확정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

오랜 논의 끝에 나온 핵심 해법은 모든 토지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444년 확정된 공법은 토지의 비옥도와 그해 농사의 풍흉을 각각 반영하도록 설계됐습니다.

전분6등법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1등전부터 6등전까지 나눈 제도입니다. 가장 좋은 땅과 가장 척박한 땅을 동일하게 보지 않고 생산력 차이를 과세에 반영했습니다.

연분9등법은 한 해 농사의 상태를 9단계로 나눴습니다. 가장 풍년인 상상년에는 1결당 20두, 가장 좋지 않은 하하년에는 4두를 거두도록 해 풍흉에 따른 부담 차이도 반영했습니다.

제도 구분 목적
전분6등법 토지 6등급 땅의 비옥도와 생산력 차이 반영
연분9등법 작황 9등급 풍년·흉년에 따라 세액 차등 적용

결국 세종은 ‘모두에게 똑같은 세금’보다 땅과 농사의 현실을 고려한 과세체계를 선택했습니다. 공법에는 세금 부담의 형평성을 높이는 목적뿐 아니라 기존 답험 과정에서 발생하던 관리의 자의적 판단과 부정을 줄이고 국가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조선 500년 세법이었을까

이준석 대표는 세종의 공법을 두고 조선 500년의 세법이 됐다는 취지로 표현했습니다. 세종의 공법이 이후 조선의 전세제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지만, 전분6등·연분9등 체계가 조선 500년 동안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공법은 1444년 시행된 뒤 현실에서 점차 변형됐습니다. 15세기 말부터 실제 전세는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6두 수준으로 걷는 방식이 관행화됐고, 1635년 인조 때 영정법이 시행되면서 공법의 연분9등 운영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500년 세법’은 세종의 세제 개혁이 조선 토지세의 중요한 토대를 만들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공법 자체가 500년 동안 원형 그대로 유지됐다는 의미라면 역사적으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준석 발언 팩트체크

주장 확인 내용
17만여 명에게 물었다 사실 총 172,806명의 의견이 집계됨
찬성 9만8천, 반대 7만4천 사실 98,657명 대 74,149명
과반인데 원안 시행 안 함 대체로 사실 1430년 정액세 원안을 그대로 전국 시행하지 않음
세법 완성에 14년 대체로 사실 1430년 대규모 의견수렴에서 1444년 확정까지 14년
조선 500년 세법 과장된 표현 후대 전세제도에 영향을 줬지만 1635년 영정법 등으로 변화

세종 공법이 남긴 의미

세종의 공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찬성률 자체가 아닙니다. 찬성이 더 많았음에도 왜 특정 지역에서 반대가 압도적으로 나왔는지를 살피고, 한 번 만든 안을 폐기하거나 시험하면서 제도를 계속 고쳤다는 과정입니다.

1430년 처음 제시된 비교적 단순한 정액세는 결국 토지의 질을 6단계로, 한 해 농사의 상태를 9단계로 나누는 세밀한 제도로 발전했습니다. 

정책 대상자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면 같은 기준을 일괄 적용하는 것이 반드시 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조선 초기의 세제 개혁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이준석 대표가 현재의 ISA 정책 논란을 비판하기 위해 세종대왕의 공법을 소환하면서 600년 전 조세 개혁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정치적 비교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세종이 대규모 의견수렴과 시험 시행, 제도 수정을 반복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충분히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과반인데도 시행하지 않았다’거나 ‘500년 동안 이어진 세법’이라는 표현만으로 공법을 이해하면 실제 역사가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세종의 공법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오래 고민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역별 토지 조건과 농민의 부담, 국가 재정, 관리의 부정 문제를 함께 고려하면서 현실에 맞는 제도를 찾으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참고자료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년 8월 10일 개혁신당 최고위원회의 관련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