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프로필과 친일행적, 가계도와 후손들의 토지 반환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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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오적 이완용 |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완용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적극 찬성한 을사5적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을 거쳐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도 핵심적으로 관여했습니다.
그의 이야기가 1926년 죽음으로 끝난 것도 아닙니다. 일본의 귀족 작위는 손자 이병길에게 이어졌고, 아들 이항구와 손자 세대 일부 역시 식민통치 체제에 협력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증손자 이윤형의 이른바 ‘조상 땅 찾기’ 소송이 친일재산 청산 문제를 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완용 프로필
| 구분 | 내용 |
|---|---|
| 이름 | 이완용(李完用) |
| 출생 |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 |
| 사망 | 1926년 2월 11일 |
| 본관 | 우봉 이씨 |
| 자·호 | 경덕·일당 |
| 주요 관직 | 학부대신·외부대신서리·내각총리대신 |
| 주요 사건 | 을사늑약·정미7조약·한일병합 |
| 일제 작위 | 백작, 이후 후작 |
이완용은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나 11세 무렵 먼 친척인 고위관료 이호준의 양자가 됐습니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으며,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뒤 주미공사단의 일원으로 미국에서 외교 경험을 쌓았습니다.
친미 관료에서 친일파로
이완용의 정치 이력에서 주목할 부분은 처음부터 친일 노선을 걸었던 인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미국 체류 이후 친미파로 활동했고 1896년부터 독립협회에서 위원장·부회장·회장 등을 맡은 경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세해진 뒤 그의 노선은 급격하게 친일로 기울었습니다. 1905년 학부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적극 찬성하면서 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과 함께 을사5적으로 지목됐습니다.
을사늑약에서 한일병합까지
1907년 내각총리대신이 된 이완용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고,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더욱 장악하게 만든 정미7조약 체결에도 앞장섰습니다.
1910년에는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병합 협상을 진행했고,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합병조칙을 받아내는 데 관여했습니다. 일본은 그해 10월 이완용에게 한일병합에 협력한 공로로 백작 작위를 수여했고 1920년에는 후작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신문에 경고문을 싣고 만세운동을 비난했습니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그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법률상 친일반민족행위로 공식 규정됐습니다.
이완용 후손 가계도
가계도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손자 이병길입니다. 그는 혈연상 이항구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가 먼저 사망하자 1914년 이승구의 사후 양자로 입적됐습니다. 이 때문에 법적으로 이승구의 아들이자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이어받을 장손이 됐습니다.
아들 이항구와 손자 이병길
차남 이항구는 일제강점기 이왕직 관료로 활동하고 조선귀족 남작이 된 인물입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포함됐습니다.
손자 이병길은 기록이 더욱 구체적입니다. 일본 가쿠슈인 고등과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하자 후작 작위를 계승했습니다.
이후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 익산 소재 임야 일부 몰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 인물 | 관계 | 주요 내용 |
|---|---|---|
| 이항구 | 차남 | 이왕직 관료·조선귀족 남작 |
| 이병길 | 손자 | 후작 승계·중추원 참의·친일반민족행위자 |
| 이윤형 | 증손자 | 1990년대 이완용 명의 토지 관련 반환 소송 |
증손자 이윤형 땅 소송
광복 이후 이완용 후손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은 증손자 이윤형의 토지 소송입니다. 1997년 서울고등법원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약 2354㎡, 약 712평의 토지와 관련한 소송에서 이윤형 측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당시 재판의 핵심은 이완용의 역사적 평가가 아니라 재산권을 박탈할 현행 법적 근거가 존재하는지 여부였습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광복 직후 만들어졌지만 1951년 폐지됐고, 친일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별도의 특별법은 2005년에야 제정됐습니다.
1997년 당시 보도에서는 해당 북아현동 토지의 가치가 약 30억원 규모로 평가됐습니다. 이윤형은 같은 해 토지를 매각한 뒤 캐나다로 이주한 것으로 이후 보도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친일재산 환수는 어떻게 달라졌나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것으로 인정되는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킬 법적 틀이 마련됐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도 2011년 친일재산을 소급해 국가에 귀속시키도록 한 핵심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선의의 제3자가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재산권 등은 별도의 법적 보호 대상이 될 수 있어 실제 환수 문제는 개별 재산의 취득 과정과 소유관계를 따져야 합니다.
후손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완용 후손을 이야기할 때는 혈연관계와 개인의 역사적 행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완용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친일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이항구나 이병길처럼 본인의 식민통치 협력 행적이 역사자료와 국가 조사에서 확인된 인물은 각각의 행위에 따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현재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후손들의 직업·거주지·가족관계 등은 신뢰할 만한 공적 자료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지 않는 것이 적절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마무리
이완용의 생애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가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는 인물로 변해갔는지를 보여줍니다.
을사늑약과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한일병합까지 대한제국의 국권이 사라지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후손의 역사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들 이항구와 손자 이병길은 단순히 친일파의 가족이었던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행적으로도 기록에 남았고, 광복 이후 증손자의 토지 소송은 친일재산 청산을 둘러싼 법적 공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다만 역사적 책임은 혈연이 아니라 각 개인의 구체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