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 (동의단지회) 명단] 12인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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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명단

1909년, 국권이 흔들리던 격랑의 시대에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은 왼손 무명지를 잘라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쓰며 목숨을 건 결의를 세웠습니다. 이 상징적 의식이 바로 단지동맹(斷指同盟)입니다. 단지의 고통을 감내한 맹세는 곧 의거 실행과 독립군 결속을 향한 실천 선언이었습니다.

단지동맹은 하얼빈 의거를 앞둔 마지막 다짐이자, 독립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어야 한다는 역사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12인이 남긴 결연한 약속을 통해, 그들의 목적·명단·역할과 활동을 다시 살피며 현재의 교훈을 찾습니다.

단지동맹이란?

단지동맹(동의단지회)은 일제의 침탈이 심화되던 1909년,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결의 모임입니다. 동지들이 스스로 손가락을 절단(斷指)해 피로 “대한독립”을 쓰고 서로의 맹세를 확인했으며, 이는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공동체적 서약이었습니다. 

단지 행위는 고통을 감수한다는 뜻 이상의 의미—의거와 항일 실천을 결행하겠다는 ‘무서(無書)의 서약서’였습니다.

동의단지회 결성 목적

첫째, 무장 의거 결행 — 하얼빈 의거를 포함해 일제 핵심 인물을 처단하고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려 했습니다. 단지는 ‘되돌릴 수 없음’을 스스로에게 각인하는 절차였습니다.

둘째, 독립군 결속 강화 — 피로 쓴 태극기는 동지들의 정신적 깃발이었고, 배신과 이탈을 막는 내적 규범이었습니다. 동맹은 참전·자금·연락·무기 등 역할을 분담해 실전 태세를 갖추는 조직적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단지동맹 12인 명단과 역할

사건이 100여 년 전인 만큼 사료마다 일부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래 표는 알려진 인물과 전해지는 역할을 토대로 재구성한 요약입니다(이름 미상 1인은 기록 공백으로 표기).

이름 역할 주요 활동
안중근(프로필) 단지동맹 주도자, 하얼빈 의거 실행 이토 히로부미 처단, 재판정 변론, ‘동양평화론’ 집필
우덕순(프로필) 의거 실행조, 현장 경호 하얼빈 역 보조, 체포·수감 후 재판
조도선(프로필) 무기 운반·은닉 의거 준비 중 체포, 옥고 치름
유동하(프로필) 의거 현장 지원 무기·정보 전달, 체포 후 수감
김기용 정보 연락 독립군–해외 세력 연락망 유지
김형진 재정 지원 군자금 모집, 물자 조달
강기희 연락책 연락·전파, 동지 규합
박명호 군자금 조달 재정 후원, 의거 지원
이성우 무기 조달 무기 구매·운송 담당
김백춘 국제 연계 중국·러시아 독립운동가와 교류
이범윤 의거 격려·지원 만주 독립군 지도자, 조언 및 지원
이름 미상 기록 부재 참가자이나 신원 미확인

역사적 의의와 파급효과

단지동맹은 상징·의지·실행의 세 요소를 동시에 갖춘 사건입니다. 하얼빈 의거 성공의 내적 기반이 되었고, 독립군·의병·유학생 사회에 ‘희생을 전제로 한 결단’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조선이 침탈의 대상이 아닌 ‘자결의 주체’임을 공표하는 정치적 효과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단지는 연대와 분담의 모델을 남겼습니다. 누군가는 전선에서, 누군가는 연락·자금·장비를 책임지는 방식의 역할 분담은 이후 독립운동 전반의 운영 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시민사회의 캠페인·연대 구조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오늘의 교훈

단지동맹은 ‘정의에는 대가가 있다’는 평범하지만 무거운 진실을 상기시킵니다. 개인의 안위를 넘어 공공의 선을 위해 기꺼이 불편과 손실을 감내한 12인의 선택은, 오늘 우리가 커다란 목표를 이룰 때 필요한 공동체적 헌신의 표준이 됩니다.

단지의 피로 적신 태극기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결심할 수 있는가?”

※ 사료마다 참여 인물·세부 역할에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 표는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요약이며, 일부는 학계 보완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